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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oper1
작성일 2004-11-26 오후 8:38:00 조회수 1169
제목 빠나마역사 구분
내용 역사

파나마에서 가장 초기에 알려진 정착민들은 쿠에바와 코클레 문화를 이룩했지만 병이나 16세기에 들어온 스페인인들의 칼에 의해 인구가 격감하였다. 카리브 연안을 따라 몇 번의 약탈이 진행된 후에 스페인은 1510년 카리브해 연안의 챠그레스(Chagres)강 입구에 개척지인 놈브레 데 이오스(Nombre de Dios)를 세웠다. 파나마의 태평양 연안은 나중에 페루 침략의 발판이 되었으며 이러한 침략으로 생긴 재산은 태평양에 있는 항구인 파나마시티로부터 육로로 놈브레 데 디오스까지 운반되었다. 이러한 재산의 이전은 해적을 들끓게 해서 18세기까지 카리브해는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배들은 파나마를 지나쳐 직접 페루로부터 케이프혼(Cape Horn)을 돌아 유럽으로 향했다.

파나마가 쇠퇴하면서 남미 국가가 1821년 독립을 이루자 콜롬비아의 한 주가 되었다. 1846년 콜롬비아는 미국이 지협을 지나는 철도를 건설하고 군대를 동원해 이것을 지키는 것을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려는 생각은 심지어 16세기에도 있었지만 1880년에 프랑스가 시도하였을 당시만 하더라도 22,000명에 달하는 인부가 말라리아, 황열병 등으로 죽었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파산하였다. 미국은 특명 전권 공사라고 워싱턴에서 칭하던 한프랑스인을 통해 프랑스가 가진 운하 건설에 대한 권리를 후하게 주고 모두 사들였으며 콜롬비아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협상 끝에 미국과의 운하 조약에 서명하였다. 즉각 미국의 재정적, 전략적 이익은 파나마의 혁명론자들의 의견과 맞아떨어지는 점을 발견하였고 미국의 공공연한 지원하에 혁명 정권은 1903년 11월 3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운하에 대한 조약은 미국이 운하뿐 아니라 파나마의 내정에 대해서도 간섭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리를 영구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양국 간에 몇 십년 동안 갈등을 유발하였는데 부분적으로는 파나마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미국이 이익을 얻는 조약의 내용 때문이며 다른 이유로 1921년 미국이 보상차원에서 콜롬비아에게 2500만 US$를 지불하기까지 콜롬비아가 파나마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1904년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해 10년 뒤에는 최초의 배가 이 공학적인 경이의 운하를 지나게 되었다. 미국은 파나마의 내정에 계속해서 간섭하였으며 1936년에 이르러서야 운하 지역 밖에서의 군사 이용 권리를 포기하였다. 양국은 1977년에 새로운 조약이 서명될 때까지 운하 계약에 대해 논쟁을 거듭했다. 이 조약은 미국의 이권을 점진적으로 감소시켜 1999년까지 운하에 대해 파나마 지배를 완전히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 장군은 1984년 이 나라를 장악했다. 예전 파나마 비밀 경찰의 우두머리이자 CIA의 직원이던 노리에가는 선동적인 괴물이 되었다. 정적을 살해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았으며 마약 밀매와 돈 세탁은 1980년대까지 그의 주요한 관심사였는데 이러한 일들은 결국 미국의 제재와 파나마 자산 동결로 이어졌다. 1989년 대통령 선거의 당선 후보를 전국 TV에서 늘씬하게 두드려 패고는 선거를 무효로 선언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노리에가 정권은 국제적인 골칫거리가 되었다. 노리에가는 스스로 1989년 정부 지도자로 지목하면서 파나마와 미국간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다음 날 사복 차림을 하고 있던 비무장의 미국 군인이 파나마 군인에게 살해되었다(미국 국방성의 주장에 따르면). 파나마의 주장으로는 이 군인이 무장을 하고 있었을 뿐더러 바리케이드로 도망치기 전에 세 명의 시민에게 총을 쏘아 상해를 입혔다고 한다.미군은 몇 달 동안이나 공격 구실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Just Cause' 작전을 위해 26,000명의 군인을 파견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파나마 침공은 노리에가를 심판하고 미국의 이권에 부합되는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목적 하에 이루어졌으며 2,000명의 민간인 사상자와 수천 명이 집을 잃는 결과를 낳았다. 노리에가는 미국 군대의 체포를 피해 6일간 바티칸 대사관으로 피신하였다. 미군은 대사관을 포위하고 바티칸에 그를 내보내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들은 심술난 10대들에게 주로 애용되는 주목할만한 심리학적 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대사관에 지독하게 쾅쾅 울리는 록음악을 틀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심리학적으로 지쳐버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부모가 알 듯이 이 작전은 효과가 있어서 노리에가는 미국으로 송치되었으며 여기에서 돈 세탁에 관련된 범죄로 기소되어 현재 플로리다에서 40년형을 받고 복역 중에 있다.

1989년 선거에서 합법적인 승리한 길레르모 엔다라(Guillermo Endara)가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엔다라의 일자리를 감소시키는 정책으로 인해 그의 정부는 초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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